제9장
서미희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녀는 김서아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하 오빠가 김서아를 집에 데려왔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친동생처럼 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김서아가 소리소문없이 자신의 오빠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김서아와의 관계가 이렇게 나빠진 것이다.
서남윤이 버럭 소리쳤다. “서미희,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가 이러는 게 네 목숨이라도 뺏겠다는 거냐? 이건 너랑 서아랑 잘 지내게 하려는 거잖아! 이렇게 간단한 일도 못 해? 대체 언제까지 고집부릴 건데?”
“고집부리는 거 아니에요.”
서미희는 남윤 오빠의 말을 듣자, 아까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따져 묻고 싶은 말들이 전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무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도 히스테리를 부리며 설명해 봤지만, 결국 아무 소용없었다.
이제 그녀는 지난 생처럼 오빠들 때문에 감정이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설명하지도, 그들의 생각을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서미희는 묵묵히 탁자 위의 교과서를 챙겨 전부 책가방에 넣었다.
그녀는 다 챙긴 책가방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별일 없으시면, 먼저 방으로 올라갈게요.”
서남윤은 소파에 앉아 곤란한 듯 머리를 짚었다.
“서미희, 네가 지금 팀에 합류하겠다고 약속하면, 우리가 네가 전에 했던 일들은 전부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어!”
서미희는 그 말을 듣고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지난 생에 그녀가 했던 모든 일들은 전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서미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올라갔다. 그 발걸음은 유난히 단호했다.
서남윤은 속이 답답해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남윤 도련님, 아가씨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그만두시죠. 다행히 서아 아가씨가 있지 않습니까.”
서남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달라.”
“남윤 도련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며칠간 도련님들께서 집에 안 들어오셨는데, 아가씨께서는 돌아오신 후로 한 번도 도련님들에 대해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무심한 모습에 제가 다 마음이 시리더군요!”
서남윤은 담배를 그대로 비벼 끄고는 차를 몰아 저택을 떠났다.
서미희는 위층에서 차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남윤 오빠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마 캠프로 갔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 샤워를 마친 뒤, 오답 노트를 다시 한번 복습했다.
반드시 노력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
서미희는 자신도 모르게 밤을 새워 날이 밝아 버렸다. 그녀는 황급히 책가방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는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남윤이 가장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서미희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쟤가 저렇게 일찍 일어났어?”
“요 며칠 아가씨께서는 기사님 차를 타지 않고 혼자 버스를 타고 나가셨습니다. 월요일에 서아 아가씨께서 도련님들과 상의하시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어 지각할 뻔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 후로 아가씨께서 토라지셔서 다시는 기사님 차를 타지 않으셨습니다!”
서남윤의 표정이 몇 분 복잡해졌다.
서북현이 다가오며 말했다. “유난 떨기는. 겨우 지각할 뻔한 거 가지고, 그렇게 속이 좁아서 누구 보라고 저러는 거야?”
서유민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남윤 오빠, 서미희는 오빠 마음 약해지라고 연기하는 거야. 이번에 오빠가 타협하면, 앞으로 서미희는 더 기고만장해질걸!”
서남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서미희가 고생을 좀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기회를 줬는데, 제 스스로 걷어찬 것이었다.
김서아는 이 대화를 듣고 눈가에 웃음을 스치더니, 깡충깡충 뛰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남윤 오빠, 북현 오빠, 유민 오빠, 좋은 아침. 우리 같이 아침 먹자.”
서남윤은 김서아의 활발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행히 이 동생은 엇나가지 않았다.
——
서미희는 학교에 도착하자 조금 졸음이 쏟아졌다. 밤을 꼬박 새웠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낮 수업 시간에도 혹시나 중요한 내용을 놓칠까 봐 무척 열심히 들었다.
수업 중, 선생님이 갑자기 김서아를 지목해 질문에 답하게 했다. 하지만 김서아는 한참을 우물쭈물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김서아 학생, 요즘 자꾸 딴생각을 하는구나. 이번 복습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시험 때 고생할 거다.”
김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김서아의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나섰다. “선생님, 요즘 서미희가 엄청 열심히 해요. 걔는 분명 알 거예요.”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서미희에게로 향했다. 대부분은 웃음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평소 서미희의 성적이 김서아보다 나빴으니, 그녀 역시 대답하지 못할 게 뻔했다.
서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명확하게 질문에 답했다.
선생님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정답이다. 서미희 학생이 요즘 아주 열심히 하는구나. 다들 서미희 학생을 본받아야 한다.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김서아는 남몰래 서미희를 힐끗 쳐다봤다.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게임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분명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서미희에게 관심이 쏠리게 만들다니, 정말 짜증 났다!
아무래도 실력을 보충해야 할 것 같았다.
서미희는 칭찬을 듣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방과 후, 서미희는 이번엔 보건실에 가지 않고 곧장 서씨 집안으로 돌아갔다.
남윤 오빠에게 낌새를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역시나 그녀가 돌아오자, 집사가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봐 무척 불편했다.
서미희는 저녁을 먹은 뒤 곧장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그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숙제를 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주우지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어쨌든 오늘 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매번 그녀가 뻔뻔하게 찾아갔을 뿐이다.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미희는 휴대폰을 빤히 보며 난감해했다.
아니면, 나중에 보낼까?
서미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숙제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어젯밤을 샌 탓일 것이다.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려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서미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째서 벌써 아침이지?
서미희는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허둥지둥 학교로 향했다.
점심시간,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보건실로 향했다.
하지만 주우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안에 있는 의사에게 물었다. “주 선생님은요?”
“주 선생님은 식사하러 가셨어요.”
서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과 후에 다시 찾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방과 후, 서미희는 다시 보건실로 갔지만 여전히 주우지는 보이지 않았다. 낮에 있던 그 의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 의사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얘야, 오늘은 내가 당직이야. 공부에나 신경 써. 그런 생각 하긴 아직 너무 이르단다.”
서미희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며칠간, 그녀는 몰래 보건실에 가봤지만 주우지를 보지 못했다.
순간, 그녀는 조금 서운해졌다. 아마 그가 보건실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에 익숙해졌나 보다.
서미희는 자신이 어느새 주우지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절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번 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이번 월말평가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절대 질 수 없다!
시험이 끝난 후, 서미희는 꽤 잘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전교 100등 안에는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이번 시험이 좀 어려웠다며 원성이 자자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주우지와의 대화창을 열었지만, 결국 무엇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서미희는 인간관계에 서툴러,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껐다.
서미희는 기분 좋게 책가방을 챙겨 집에 돌아왔다. 거실이 왁자지껄한 것을 보니, 오빠들이 모두 돌아와 있었다. 캠프에 안 갔나?
그녀가 나타나자, 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그녀만이 불청객이 되어, 오빠들과 김서아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았다.
